[리뷰]노르웨이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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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아버지는 불교 승려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오사카 출신 상인의 딸이었습니다. 하루키는 국어교사였던 부모로부터 일본 문학에 관해 배웠습니다. 문학부 연극과에 입학하여 드라마를 공부했으며, 졸업하기 전에 재즈바를 개업해서 운영하였고 이때부터 집필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미국 문학에서 영향을 받은 간결하고 세련된 문체와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과 허무의 감성은 당시 젊은이들로부터 큰 공감을 불러일으켜 작가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Review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궁금했는데 마침 집에 책꽂이에 먼지만 쌓여있는걸 발견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이 과거에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읽혔던 것을 생각해보면, 청춘과 상실(죽음)에 관련된 내용에 집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삶이란 무엇일까요?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이 동일할 겁니다. 학생일 때는 모든 제약이 풀리는 성인이 된다는 게 항상 기다려왔죠. 하지만 성인이 되면 모든 게 변합니다. 환기를 시킬 겸 방의 창문을 연 것처럼 세상의 차가운 바람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오직 나만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20살 이후에도 똑같습니다. 20대 초반, 중반, 후반을 지나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도피할 수는 없습니다. 현실을 외면할수록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뿐이죠.

“나는 지금 서른여덟이고, 곧 마흔이야. 나오코하고는 달라. 내가 여기에서 나간다 한들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반갑게 맞아 줄 가족도 없고, 할 일도 없고, 친구도 거의 없어. 게다가 여기에서 벌써 칠 년이나 있었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지. 물론 때로는 도서관에서 신문을 읽기도 해. 그렇지만, 나는 여기에서 칠 년 동안 한 발짝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어. 이제 세상으로 나간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리가 없다고.”

“성장의 고통 같은 것을. 우리는 지불해야 할 때 대가를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청구서가 이제 돌아온 거야.”

하루키는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을 했습니다.

“스무 살이 되다니, 어쩐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난 아직 스무 살이 될 준비가 하나도 안 됐는데, 기분이 이상해. 왠지 누군가가 뒤에서 억지로 떠민 것 같아.”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할 거야. 어른이 되는 거지. 그래야만 하니까. 지금까지 나는 가능하다면 열일곱, 열여덟에 머물고 싶었어.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난 이제 십 대 소년이 아니야. 난 책임이란 것을 느껴. 봐, 기즈키, 난 이제 너랑 같이 지냈던 그때의 내가 아냐. 난 이제 스무 살이야. 그리고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만 해.

그리고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노르웨이의 숲에서 등장인물들은 모두 상실을 겪게 됩니다. 상실로 인하여 무기력, 허무함, 공허함에 휩싸이게 됩니다. 기즈키의 죽음으로 나오코는 현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기즈키와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와타나베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신히 현실을 살아갔지만 나오코의 죽음으로 인하여 현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저 열일곱 살 5월의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잡아챈 죽음은, 바로 그때 나를 잡아채기도 한 것이다.

열여덟 다음은 열아홉이고, 열아홉 다음은 열여덟,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고 가을이면 나도 스무 살이다. 죽은 자만이 영원히 열일곱이었다.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그렇게 죽어 가는 거야. 천천히 죽음의 그림자가 생명의 영역으로 파고들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둠이 깔렸고, 주변 사람들도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으로 바라보는 상황. 그런 거 정말 싫어. 견딜 수 없어, 난.”

내가 아는 거라고는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해 내 젊음의 기능 일부가 완전하고도 영원히 망가져 버린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뚜렷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 것인지, 그것은 나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일이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든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어이, 기즈키, 넌 옛날에 내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어들였어. 지금, 나오코가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갔어. 가끔은 내가 마치 박물관 관리인이 된 듯한 기분이야.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는 휑한 박물관 말이야.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곳을 관리하는 거야.

하지만 여기에 홀로 빛나는 등장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미도리입니다. 부모님의 죽음을 겪었지만, 상실을 극복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미도리야말로 소설 속에서 가장 성숙한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미도리의 물음에 홀로 남은 와타나베가 답을 하며 소설은 끝이 납니다.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야?”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은은한 소설의 분위기를 온전히 느끼면서 읽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인상 깊은 구절 소개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죽음이란 것을 완전히 삶에서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했다. 다시말해 ‘죽음은 언젠가 우리를 잡아챌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죽음이 우리를 움켜쥐는 그날까지 우리는 죽음에게 붙잡히지 않는다.’라고 그것은 나에게 너무도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삶은 이쪽에 있고, 죽음은 저편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고, 저쪽에 있는게 아니다.

외부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뒤틀렸음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 그러나 우리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뒤틀림이야말로 존재의 조건이야. 인디언이 머리에 자기 부족을 상징하는 깃털을 꽂듯이 우리는 뒤틀림을 끌어안고 있어.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사는 거야.

“그런 상태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잖아 우리는 점점 커 갈 거고 사회 속으로 나가야만 했어, 넌 우리한테 정말 중요한 존재였어. 너는 우리와 바깥 세계를 연결해 주는 연결 고리 같은 의미를 띤 존재였어. 우리는 너를 매개로 하여 바깥 세계에 동화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던거야. 결국은 잘되지 않았지만.”

나도 매일 아침 나의 태엽을 감아. (중략) 대체로 서른여섯 번 정도 끼륵, 끼륵 태엽을 감아. 자, 오늘도 하루를 잘 살아 보자고 하면서, 스스로는 못 느끼는데 요즘 들어 내가 혼잣말을 자주 한다고들 해. 아마도 태엽을 감으면서 뭐라고 혼자 중얼대는 말일 테지.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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