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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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인류의 새로운 의제
  • 제1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1. 인류세
      1. 인간의 광휘
  • 제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1. 스토리텔러
      1. 뜻밖의 한 쌍
      1. 근대의 계약
      1. 인본주의 혁명
  • 제3부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1. 실험실의 시한폭탄
      1. 중대한 분리
      1. 의식의 바다
      1. 데이터교

Review

저자의 사피엔스를 너무 재밌게 읽어서 읽게 된 책입니다.

데우스는 라틴어로 신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데우스로 진화한다는 저자의 생각이 나타납니다.

지구를 정복하고 신이 된 호모 사피엔스의 남은 의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세상은 진화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목차별로 인상적인 구문 위주로 소개하면서 책의 내용에 대해 요약해보겠습니다.


1. 인류의 새로운 의제

오히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아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과식이다.

지난 세기 동안 인류는 인구증가와 교통발달로 인해 전염병에 점점 더 취약해졌다. (중략) 오늘날 전 세계 교통망은 1918년보다 훨씬 효율적인 전달망 역할을 한다.

현재 설탕은 화약보다 위험하다.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 되면서 전쟁의 채산성이 떨어졌고, 전쟁은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물질기반 경제를 운영하는 지역, 예컨대 중동이나 중앙아프리카에서만 일어나게 되었다.

미국이나 유럽에 사는 보통 사람에게는 알카에다보다 코카콜라가 훨씬 더 치명적인 위험이다.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 투쟁에서 인류를 건져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현대 의학은 인간의 자연수명을 단 1년도 연장하지 못했다. 의학은 떼이른 죽음에서 우리를 구하고 우리가 주어진 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사상가와 정치인은 물론 경제학자들조차 GDP(국내총생산)를 GDH(국내총행복)로 보완하거나 대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높은 수준의 부, 안락, 안전을 누리는 선진국의 자살률이 전통사회들보다 훨씬 더 높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생화학적 행복 추구는 세계 최대의 범죄 원인이기도 하다.

수천 년 역사는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격변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딱 하나의 상수가 있었는데, 바로 인류 그 자체이다. 우리의 도구와 제도는 성경시대와 다르지만, 마음의 심층구조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우리가 데이터를 더 많이 보유할수록, 역사를 더 잘 이해할수록 역사는 그 경로를 빠르게 변경하고, 우리의 지식은 더 빨리 낡은것이 된다.

그럼에도 역사학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가 평상시 고려하지 않는 가능성들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다.

2. 인류세

지구의 모둔 대형 육상 포유류의 약 50%를 멸종으로 내몰았다. 이 모든 멸종 사건들은 그들이 최초의 밀밭에 파종하고, 최초의 금속 도구를 만들고, 최초의 글을 쓰고, 최초의 동전을 주조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가축들은 종種 이라는 집단으로는 독보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개체 수준에서는 전례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모든 종교는 존재의 자연적 위계에 따라, 특정한 제약을 지키는 한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들을 통제하고 이용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중략) 인간은 이렇게 ‘농업계약’을 이행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

유신론이 신을 내세워 농업을 정당화했다면, 인본주의는 인간을 내세워 공장식 축산 농장을 정당화했다.

3. 인간의 광휘

반면 다윈은 우리에게서 영혼을 박탈했다. 당신이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영혼은 없다는 이야기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것은 독살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도뿐 아니라 세속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충격적인 이야기다. 인간은, 비록 분명한 종교적 교의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저마다 일생 동안 변하지 않고 자신이 죽어도 그대로인 영원한 개인적 본질을 가졌다고 믿고 싶어 한다.

우리가 세계를 정복한 주요 요인은 여럿이 소통하는 능력이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들이 유전암호와 전자암호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상호주관적 실재가 객관적 실재를 삼키고 생물학은 역사와 융합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21세기에 허구는 소행성과 자연선택을 훨씬 능가하는,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믿음을 강화하면서 자기영속적인 고리를 만든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상호 확증을 거듭하며 의미의 그물망을 팽행하게 만든다.

그런데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면 의미의 그물망이 풀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그물망이 만들어진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의 그물망들이 생기고 풀리는 것을 지켜보고, 한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후손에 이르러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4. 스토리텔러

약 5,000년 전 수메르인들이 문자와 돈을 발명했을 때, 이 장애물이 마침내 사라졌다. (중략) 이 두 발명품은 인간 뇌의 데이터 처리 한계를 깼다. 문자와 돈 덕분에 수십만 명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복잡한 관료제를 조직하고 거대한 왕국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텍스트와 실제가 충돌할 경우 때로는 실제가 물러나야 한다는 게 사실일까? (중략) 관료들은 권력을 축적하면서 실수에 무뎌진다. 그들은 실제에 맞춰 이야기를 바꾸는 대신 이야기에 맞춰 실제를 바꾼다. (중략) 현재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직면한 난제들의 대부분이 실정에 맞지 않는 국경선에서 기인한다. 유럽 관료들이 종이 위에 그은 상상의 선들이 아프리카에 실제하는 국경선과 만났을 때 뒤로 물러난 것은 실제였다.

성경의 세계관은 비록 오류이긴 했지만 대규모 협력을 위한 더 나은 토대를 제공했다.

허구는 우리의 협력을 돕는다. 그 대가로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것은 이 허구가 협력의 목표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매우 정교한 협력 시스템을 가졌다 해도, 그 시스템은 정작 허구적 실체의 목표와 이익을 위해 이용된다.

5. 뜻밖의 한 쌍

종교를 규정하는 것은 신이 있고 없고의 여부가 아니라 사회적 기능이다. 종교는 사회구조에 초인적 법칙이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규범과 가치를 정당화한다. 종교는 우리가 창조하지 않았으므로 바꿀 수도 없는 어떤 도덕법 체계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더 중요한 사실은, 과학이 잘 작동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의 도움이 항상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과학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다른 무엇보다 질서에 관심이 있다. 종교의 목표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한편 과학은 다른 무엇보다 힘에 관심이 있다. 과학의 목표는 연구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고 전쟁을 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힘을 획득하는 것이다.

6. 근대의 계약

근대성은 일종의 계약이다. 우리 모드는 세상에 태어나는 날 이 계약에 서명하고, 죽는 날까지 이 계약의 통제를 받는다. (중략) 근대는 놀랍도록 간단한 계약이다. 계약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이다. 즉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힘을 계속 추구하게 하는 동력은 과학의 진보와 경제성장의 동맹이다.

세계를 크기가 고정된 파이로 보는 전통적인 세계관은 이 세계에 오직 두 종류의 자원만 존재한다고 본다. 바로 원재료와 에너지이다. 하지만 실은 세 종류의 자원이 존재한다. 원재료, 에너지 그리고 지식이다.

또한 우리는 생태계의 파국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계급마다 다를 거라는 점도 걱정해야 한다. 역사에 정의는 없다. 재난이 발생하면 으레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훨씬 더 고통을 당한다.

그 결과 생겨난 불안을 상당 부분 달래준 것이 자유시장 자본주의였다. 이 이데올로기가 이토록 인기를 얻게 된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 사상가들은 우리를 안심시키는 말을 반복한다. “걱정 마. 모든 것이 잘될 거야. 경제가 성장하는 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보살펴줄 거야.” 자본주의는 이런식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가 어디로 질주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탐욕과 혼돈의 시스템을 신성화했다.

7. 인본주의 혁명

무의미하고 무법적인 존재에게 해독제를 제공한 것은 인본주의였다. (중략) 이 새로운 종교는 인류를 숭배하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에서 신이 맡던 역할, 불교에서 도교에서 자연법이 맡던 역할을 인류에게 요구한다.

그러므로 근대의 핵심인 종교혁명은 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믿음을 얻은 것이었다.

행동보다 느낌과 경험에 주목하는 인본주의적 관점은 예술을 탈바꿈시켰다. 워즈워스, 도스토옙스키, 디킨스, 졸라는 용감한 기사와 그들의 영웅적 행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대신 평범한 노동자와 주부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기술했다.

갈등은 자연선택의 원재료로 진화를 추동한다.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고, 따라서 인간의 경험들이 서로 충돌할 때는 최적자가 다른 모든이를 누른다. (중략) 하지만 우리가 인권이니 인간 평등의 명목으로 최적자를 거세한다면, 초인간은 커녕 호모 사피엔스의 쇠락과 멸종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늑대보다 우월한 것처럼 인간의 문화들 가운데서도 일부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더 수준이 높다. 인간 경험에는 분명한 위계가 존재하고,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기어나와 전열을 가다듬고 세계를 정복했다. 슈퍼마켓이 강제노동수용소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21세기의 주력상품은 몸, 뇌, 마음이 될 것이고, 몸과 뇌를 설계할 줄 아는 사람들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는 디킨스의 영국과 마디의 수단 사이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실은 사피엔스와 네안테르탈인 간의 격차보다 클 것이다. 21세기 진보의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은 창조와 파괴를 주관하는 신성을 획득하는 반면, 뒤쳐진 사람들은 절멸에 직면할 것이다.

8. 실험실의 시한폭탄

경험하는 자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경험하는 자아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참조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기억을 끄집어내고 이야기를 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모두 우리 안에 있는 매우 다른 실체인 ‘이야기하는 자아’의 독단이다.

이야기하는 자아도 여러 가지 지름길을 선택한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지는 않고, 대개 중요한 순간과 최종결과만을 이용해 이야기를 엮는다. 경험 전체의 가치는 중요한 순간과 결말의 평균으로 결정된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상상 속 이야기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할수록 그 환상에 집요하게 매달린다. 그 희생과 자신이 초래한 고통에 필사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기 때문이다. 정치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우리 아들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9. 중대한 분리

프랑스 혁명 이후 200년에 걸쳐 민주주의를 방어한 일반적 논증에 따르면, 민중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하는 이유는 독재국가보다 민주주의 국가의 병사와 노동자들이 더 뛰어난 수행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민중에게 정치적 권리를 주면 그들의 동기와 진취적 정신이 고취되고, 이는 전쟁터나 공장에서 유용하다.

제 1차세계대전 직후 주어진 여성의 참정권을 뒷받침하는 논리도 비슷핟. 전면적인 산업전쟁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국가들은 평상시에도 여성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인간 의사가 전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평범한 진단보다 높은 수준의 창의력을 요하는 일들은 가까운 미래에도 여전히 인간의 손에 맡겨질 것이다.

알고리즘이 인간을 직업시장에서 몰아내면 전능한 알고리즘을 소유한 소수 엘리트 집단의 손에 부와 권력이 집중될 것이고, 전례 없는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할 것이다. 아니면 그 알고리즘들이 스스로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

21세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값진 자료는 아마 개인적 데이터베이스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겨우 이메일 서비스와 웃긴 동영상을 제공받는 대가로 첨단 기술기업에게 그 데이터를 넘기고 있다.

인류가 생물학적 계급으로 쪼개지는 즉시 자유주의 이념의 근간이 파괴될 것이다.

10. 의식의 바다

이런 신흥 기술종교들을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기술 인본주의와 데이터 종교이다.

현대 인류는 소외공포를 앓고 있고, 우리는 전보다 선택의 여지가 많아졌지만 선택한 것에 실제로 집중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수백만 년 동안 우리는 성능이 향상된 침팬치로 살앗다. 그리고 미래에는 특대형 개미가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더 과감한 기술 종교는 인본주의의 탯줄을 아예 끊으려 한다. 기술종교는 인간의 욕망과 경험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세계를 예견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욕망과 경험 대신 의미와 권위의 원천이 될까? 현재 역사의 대기실에 앉아 면접을 기다리고 있는 후보는 단 하나 바로 정보이다. 가장 흥미로운 신흥종교는 데이터교이다. 이 종교는 신도 인간도 우러러보지 않는다. 이 종교는 데이터를 숭배한다.

11. 데이터교

데이터교는 우주가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현상이나 실체의 가치는 데이터 처리에 기여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실질적으로 데이터교도들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믿지 않고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더 신뢰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중앙 프로세서가 모든 데이터를 처리하고 모든 결정을 내리는 극단적인 상황을 공산주의라 부른다. 공산주의 경제는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

자본주의가 냉전에서 승리한 것은, 적어도 기술 변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에는 중앙 집중식 데이터 처리보다 분산식 데이터 처리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실용적 계명들을 갖고 있다. (중략) 첫 번째 계명은 ‘가능한 한 많은 매체와 연결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함으로써 데이터 흐름을 극대화하라’는 것이다. (중략) 두 번째 계명은 연결되기를 원치 않는 이단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시스템에 연결하라는 것이다.

개인은 점점 누구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거대 시스템 안의 작은 칩이 되어가고 있다.

18세기에 인본주의는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신을 밀어냈다. 21세기에 데이터교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데이터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인간을 밀어낼 것이다.

과거에 검열은 정보의 흐름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런데 21세기의 검열은 사람들에게 관계 없는 정보들을 쏟아붓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모르고,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쟁점에 대해 조사하고 논쟁하느라 시간을 보내기 일쑤이다. 고대에는 힘이 있다는 것은 곧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오늘날 힘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무시해도 되는지 안다는 뜻이다.


사피엔스에 이어서 유발 하라리의 두 번째 책을 읽어봤습니다. 사피엔스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호모 데우스만 읽어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자의 책을 읽으면 하나의 현상을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텍스트와 실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데이터 처리 방식 은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선으로 미래에 대해서 예측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2015년에 발간된 책이라고 생각해보면 소름 돋을 정도로 현실이 책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11. 데이터교 에서는 제가 IT를 업으로 삼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더 많이 공감되고, ‘이 사람 정말 역사학자가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국 이후로 AI는 인간보다 훨씬 더 높은 지능을 가졌다는 게 기정사실로 되었습니다. AI가 모든 노동을 대신하여 인간은 행복만을 추구하는 장밋빛 미래가 펼쳐져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미래에는 영화 터미네이터와 같이 스카이넷에 지배당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미래의 호모 사피엔스는 신, 인간, 데이터에서 어떤 가치를 선택할까요. 아니 이미 신이 되어버릴 호모 데우스가 결정해야할 문제입니다.

새로운 종교 데이터교가 인본주의를 밀어내는 현시대에서 유발 하라리의 미래에 대한 경고가 담겨있는 질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1.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할까?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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